한나라 한신은 전투에서 산을 등지고 싸워야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강을 등지고 부대를 배치하여 싸움을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배수진이라고 부른다.
산을 등지고 싸우면 불리한 상황에서 산으로 후퇴하여 전투력을 보전하기 용이하다, 하지만, 강을 등지고 싸우면 뒤로 물러설 곳이 없게된다. 뒤로 물러서게 된다면 물에 빠져서 죽기 떄문이다. 즉,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에서 싸움을 하게 된다.
미치 궁지에 몰린 쥐가 죽기 살기로 고양이에게 덤비는 것과 같이 군인은 온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다. 손자는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으므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모두 보라고 한 것처럼, 한신 장군은 배수진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보았으며, 이로움을 극대화하고 해로움을 줄이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했다.
정형구 전투는 기원전 204년 10월, 한신이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해 들어가 때 정형구에서 벌어진 전투다. 정형구는 지금의 화북성 정형현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산맥이 꾾긴 곳으로 두 산 사이가 좁게 형성되어 입의 형태를 한 곳이다.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험지다.
조나라의 왕 조헐과 승상 진여는 한나라 한신이 처들어온다는 소식에 군사를 모으고 정형구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 떄 신하 이좌거가 승상 진여에게 자신에게 군사 3만 명을 주면 한신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겠다고 건의한다. 정형구의 좁은 목으로 한신의 본대가 들어오면 조나라군이 앞뒤로 한신의 군대를 포위할 수 있는 형국이라쉽게 일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조왕 조헐과 승상 진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나라 왕 조헐은 적의 병력은 적은데 굳이 대군으로 그러한 기책을 쓰면 제후국의 제후로부터 웃음거리가 된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조나라 조헐과 승상 진여가 이좌거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첩보를 통해 들은 한신은 아주 기뻐하며, 작전을 세운다. 당시 한신가 가지고 있던 병력 3만은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병력이 죽기 살기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싸우기로 계획한다. 바로,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물을 등지고 싸우는 것은 병법서에서 권장하지 않는 방법이다. 하지만 후퇴하면 강물에 빠져 죽기 때문에, 어짜피 죽을 바에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신은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훈련이 부족한 군대를 단합하고 열심히 싸우게 만들게 된다.
그래서 정형구 앞 큰 강을 건너 1만 명의 병력을 배수진으로 배치한다. 그리고 남은 병력 2,000명은 은밀히 조나라 성 외곽 숲에 침투하여 매복시킨다.
한편, 조나라는 한신이 배수진을 치는 것을 보고 병법도 모른다고 조롱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신은 대장기를 높게 들고 병력을 직접 이끌고 조나라의 성을 공격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후퇴하면서 1만 명이 배수진을 치고 있는 곳에서 병력을 합류하여 사투를 벌인다.
조나라 측에서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한신의 군대를 전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성안의 모든 병력이 나와서 전투를 벌인다. 이 때 미리 매복하고 있던 한신의 2,000명의 군대가 순식간에 조나라의 성에 침투하여 성을 점령하고, 성곽 여러 곳에 한나라의 붉은 깃발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북과 징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북과 징소리를 들은 조나라의 군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나라의 군대는 앞뒤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조나라 군사들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공황이 발생해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한신은 조나라의 군대를 앞뒤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20만 명의 대군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投之無所往이면 死且不北니 死焉不得士人盡力이리요
兵士甚陥崱不懼하고 無所往萴固하고 入深萴拘하고 不得已萴鬪라
是故로 其兵 不修而戒하며 不求而得하며 不約而親하며 不令而信하리니
禁祥去疑면 至死토록 無所之니
吾士 無餘財는 非惡貨也오 無餘命이 非惡壽也라
令彂之日에 士卒坐者 涕霑襟하고 偃臥者 涕交頤하나니
投之無所往이면 崱諸劂之勇也라.